앞서 3D 프린팅을 중심으로 탄생한 제조업 플랫폼들이 어떻게 영역을 넓혀가며 성장했는지 <제조업 플랫폼의 시대가 열리다> 참조 살펴 봤습니다.
2세대 제조 플랫폼의 한계
2세대 제조업 플랫폼은 보통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은 뒤 이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파트너 제조업체들을 찾아 연결해 줍니다. 이 때 플랫폼이 중간에서 품질과 공정을 관리하는 게이트키핑(gate keeping) 역할을 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반적인 B2C 플랫폼처럼 플랫폼 사업자가 판을 깔아주면 고객과 공급자가 직접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중간에서 거래 전반을 관리하는 적극적인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남녀간의 만남에서 중간에 부모님이 개입해 자녀를 일정 부분 통제하는 것과 비슷하죠. 이는 해외의 조메트리나 3D허브스, 에이팀벤처스가 캐파 이전에 운영하던 크리에이터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중간에 플랫폼이 개입해 공정을 관리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은 공산품과 달리 매 주문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제품을 생산해내야 하는 제조업의 특성상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품질 관리가 잘 되어야 고객이 플랫폼을 신뢰하게 되고 재구매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중간에서 얼마나 관리를 잘 해주느냐는 플랫폼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됩니다.
‘게이트키핑’ 방식으로는 비약적 성장 어려워
문제는 이런 게이트키핑 방식은 플랫폼 입장에서 지나치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입니다. 매 계약 건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따라붙어 거래 과정을 챙기고 검수까지 하려면 상당수의 전문인력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회사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그에 맞춰 인력과 투입 자원 또한 늘어나야 합니다. 주문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에 대응할 인력이 준비되지 않으면 늘어나는 주문을 처리할 수 없는 구조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여타 성공적인 온라인 플랫폼처럼 참여자가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비약적인 성장이 이뤄지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플랫폼의 경쟁력은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고, 이를 바탕으로 더 좋은 서비스, 새로운 서비스가 탄생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서 나옵니다. 하지만 충분한 수의 참여자를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이러한 선순환은 일어나기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에이터블을 운영하던 에이팀벤처스는 어느덧 이러한 한계를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매출이 안정세를 나타내면서 비로소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올라서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순조로운 듯 보였지만, 여기에 안주할 경우 얼마 안 가 성장판이 닫힐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고객과 제조업체는 “직접 소통하고 싶다”
결국 에이팀벤처스는 다시 한번 사업모델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조 분야의 수요와 공급을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연결’하기 위해 2020년 9월 온라인 제조 플랫폼 캐파(CAPA)를 출시한 것입니다. 캐파는 플랫폼이 중간에서 개입하는 대신 고객과 제조업체가 직접 만나 소통하도록 하는, 플랫폼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3세대 제조업 플랫폼입니다.
얼핏 보기엔 이전보다 서비스가 단순해지면서 플랫폼의 역할이 크게 줄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놓고 에이팀벤처스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이미 고객과 전문가를 연결시켜주는 일부 플랫폼에서도 제조와 관련한 거래도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고객과 제조업체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만 갖고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같은 우려에도 순항하는 듯했던 크리에이터블을 접고 캐파를 출시하게 된 것은 그동안 크리에이터블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접한 수많은 고객들에게서 공통된 목소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는 “무엇보다 크리에이터블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고객과 파트너가 직접 소통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전 크리에이터블 서비스에서는 플랫폼을 운영하는 에이팀벤처스가 고객으로부터 도면을 받아 이를 토대로 파트너(제조업체)와 소통했습니다. 중간에서 양쪽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다 보니 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직접 소통을 요청하는 고객이나 파트너도 적지 않았습니다.
고객과 파트너를 직접 연결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판단이 서자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또 한차례 피보팅(pivoting·사업모델 전환)에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고객과 파트너 사이를 오가며 양측의 생각을 전달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보다 고객에게 최적의 제조업체를 매칭시켜 주고, 이들이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커플매니저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제조업 플랫폼 3세대에 해당하는 캐파(CAPA)가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최신 IT기술로 제조업계의 페인포인트 해결
제조 주문은 음식을 배달시키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는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짜장면 만드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짜장면을 배달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제조의 경우엔 주문하는 고객도 도면을 비롯해 본인이 주문하려는 제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단순히 고객과 공급자를 연결해준다고 해서 저절로 소통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제조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은 고객과의 소통은 마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과 소통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때로는 통역이 필요하고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여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제조업계에서는 ‘제품 생산비용의 절반이 인건비라면, 인건비의 절반은 기술적인 요구사항을 논의하고 가격을 협상하는 데 들어간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만큼 고객과의 소통이 어렵고 지난하다는 얘깁니다.
캐파의 경쟁력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캐파는 고객과 파트너가 불필요한 오해 없이 쉽고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즉, 제조의 언어라 할 수 있는 도면을 안전하고 쉽게 공유하고, 고객과 제조업체가 실시간으로 도면을 동시에 보면서 채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최신 IT기술을 접목해 전문가의 개입 없이도 고객과 제조업체가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에이팀벤처스는 그동안 제조업 플랫폼 1세대에 해당하는 쉐이프엔진(Shapengine)과 2세대 크리에이터블(Creatable) 서비스를 운영하며 체득한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제조업 분야의 핵심적인 페인포인트(pain point)를 찾아냈습니다. 앞으로도 온라인 제조 플랫폼 캐파(CAPA)를 운영하면서 제조업 현장의 문제점과 고객들의 니즈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면서 국내외 제조업 환경을 혁신해 나갈 것입니다.
현재 전세계 제조업 플랫폼 업체들은 합병이나 증시 상장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서는 등 본격적인 플랫폼 전쟁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제조업계의 아마존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제조업 생태계를 혁신하는 노력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문화에 대한 장벽이 낮아 사업을 국경 너머로 확대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제조업 특성상, 이러한 외부 환경 변화는 캐파와 같은 국내 제조업 플랫폼에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편 누가 제조업의 ‘롱테일’을 차지할 것인가에서 계속>
“롱테일 법칙에서 볼 수 있듯이 21세기 제조업에서는 블록버스터 상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대 제조업 기업의 독점이 사라질 것이다.”
크리스 앤더슨 <롱테일의 법칙> <메이커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