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기술이 주목을 받고 확산되기 시작하면 자연히 그와 연계한 프로젝트와 사업들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2010년대 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3D 프린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렙랩이나 메이커봇처럼 <제조의 디지털화, DIY를 ‘메이커스’로> 참조 그 때까지 산업용으로만 제작되던 3D 프린터를 값싼 보급형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어서 3D 프린팅과 연계한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매거진 포브스(Forbes)는 지난 2019년 ‘서비스형 제조 플랫폼: 새로운 효율화 혁명(Manufacturing-As-A-Service Platforms: The New Efficiency Revolution)’이란 기사에서 “3D 프린팅 시대의 도래는 또다른 강력한 변화에 시동을 걸었다, 바로 서비스형 제조(MaaS) 플랫폼의 부상”이라고 말했습니다. 3D 프린팅이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에서 온라인 기반의 서비스 플랫폼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3D 프린팅
3D 프린팅과 연계해 가장 자연스럽게 등장한 서비스는 아직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3D 프린팅을 초심자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였습니다.
쉐이프웨이즈(Shapeways)
쉐이프웨이즈(Shapeways)는 지난 2007년 네덜란드의 글로벌 기업인 필립스의 디자인 부문에서 분사해 설립된 기업입니다. 이듬해부터 고객이 3D 프린팅을 위한 CAD(컴퓨터지원설계) 파일을 보내면 이를 토대로 시제품을 제작해주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디자이너들이 올려놓은 3D 프린팅 디자인을 필요한 고객에게 연결해주는 사업도 했습니다. 3D 프린팅 설계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제품이나 부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스컬프테오(Sculpteo)
지난 2009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스컬프테오(Sculpteo)는 고객이 온라인으로 부품을 주문하면 3D 프린터로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3D 프린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고객을 위해 3D 프린팅 도면 설계를 도와주고 3DP 파일을 거래할 수 있는 장도 마련했습니다. 지금도 3D 프린팅 외길을 걷고 있는 이 회사는 지난 2019년 독일의 글로벌 화학업체 바스프(BASF)에 인수됐습니다.
쉐이프웨이즈나 스컬프테오가 3D 프린팅 주문생산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다소 다른 관점에서 3D 프린팅에 접근한 경우도 있습니다.
3D 프린팅이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신기술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후에도 아직 산업 분야에서 3D 프린팅에 대한 수요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존 제조업체들은 좀처럼 3D 프린팅에 투자하기를 꺼렸고, 큰맘 먹고 3D 프린터를 구입한 회사들은 주문이 많지 않아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허브스(Hubs)
지난 201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설립된 3D허브스(Hubs, 현 Hubs)는 이와 같은 틈새에 착안해 3D 프린터를 가진 쪽(공급자)과 이를 필요로 하는 쪽(수요자)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구축했습니다. 3D 프린터 ‘공유’ 서비스입니다. 이 같은 서비스는 시장의 반응이 몹시 좋았습니다. 이에 3D허브스는 미국과 프랑스, 독일 등에도 지사를 설립하며 빠르게 사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에이팀벤처스 ‘쉐이프엔진’ 출시
현재 캐파(CAPA) 서비스를 운영하는 에이팀벤처스의 초기 사업모델도 3D 프린터를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였습니다. 애초 국산 3D 프린터 제작을 위해 지난 2014년에 설립된 에이팀벤처스는 3D 프린팅과 연계된 온라인 서비스를 고민하던 중 3D 프린팅 출력을 원하는 사람과 3D 프린터를 보유한 사람을 연결해주는 온라인 플랫폼인 쉐이프엔진(Shapengine)을 출시했습니다.
프린터가 없는 사람은 값비싼 장비를 구입하지 않고도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3D 프린터를 이용하고, 3D 프린터를 보유한 사람은 비는 시간에 외주 생산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플랫폼은 중간에서 양쪽을 연결해준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쉐이프엔진은 당시 국내에서 아직 생소한 3D 프린터를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는 금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공급자로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보급형’ 프린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출력할 수 있는 제품의 종류나 규모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를 제대로 된 비즈니스로 키우기 위해선 보다 규모가 큰 플레이어들을 참여시켜 사업 규모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굳이 3D프린팅만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앞서 소개한 3D허브스는 올해 사명을 허브스(Hubs)로 변경했습니다. 기존 이름에서 3D 프린팅을 상징하는 ‘3D’를 떼어낸 것입니다. 이같은 조치는 이 회사가 더 이상 사업의 중심축을 3D 프린팅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변화는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됐습니다. 이 회사 창업자(Bram De Zwart)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3D 프린터의 수요와 공급을 연결해주는 3D허브스의 사업모델이 인기를 끌자 일부 고객들이 ‘이 좋은 서비스를 굳이 3D 프린팅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제조공정으로 확대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3D허브스는 3D 프린팅 이외에도 CNC, 판금(sheet metal) 등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지금은 고객이 온라인으로 부품이나 시제품 제작을 의뢰하면 순식간에 견적을 낸 뒤 파트너 제조업체를 통해 제품을 생산, 수 일 내에 물건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서 3D 프린팅에 국한했던 온라인 제조 서비스를 1세대라고 한다면, 온라인에서 전통적인 제조업 전반을 아우르는 주문 생산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델을 2세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0년을 전후해 이처럼 온라인에서 고객의 주문을 받아 다양한 가공방식으로 맞춤형 부품이나 시제품 등을 생산해주는 2세대 주문제조(manufacturing on-demand)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조메트리, 제조업의 아마존 표방
지난 2013년에 설립된 미국의 조메트리(Xometry)는 제조업의 아마존(Amazon)을 표방했습니다. 이 회사 홈페이지에 게시된 창업자 레터에서는 “우리의 비전은 단순하다. 사람들이 쓰고 읽는 책에도 웹 기반의 편리한 시장이 형성돼 있다면 사람들이 만들고 사용하는 제조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라고 밝혔습니다.
조메트리는 고객이 홈페이지를 통해 도면 파일과 요청사항을 업로드하면 이를 분석해 적정 견적과 납기일을 결정한 뒤 5000여 파트너사(제조업체) 가운데 가장 적정한 곳에 주문을 의뢰합니다. 이후 제품이 생산되면 자체 검수를 거쳐 고객에게 전달합니다. 고객은 도면만 올려 놓으면 조메트리의 도움을 받아 손쉽게 원하는 제품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프로토랩스, 최대 하루만에 부품 생산 ‘뚝딱’
지난 1999년에 설립된 프로토랩스(Protolabs)는 일찌감치 제조를 디지털화해 신속하게 ‘직접’ 맞춤형 제품을 생산해내는 회사입니다. 일찍이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이 회사 창업자 래리 루키스(Larry Lukis)는 당시 시제품을 만드는 데 턱없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데 불만을 품고, 여러 제조 공정을 효율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제조 공정을 자동화했습니다. 이 회사는 현재 고객이 원하는 공정을 선택해 3D CAD(컴퓨터지원설계) 파일을 업로드하면 최대 하루 만에도 제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습니다.
2세대 제조플랫폼 ‘크리에이터블’
이처럼 해외에서 2세대 제조업 플랫폼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던 시기, 1세대 모델인 3D 프린터 공유 플랫폼을 운영하던 에이팀벤처스는 이같은 모델로는 성장이 어렵다고 보고 사업모델을 전환하기로 결정합니다.
에이팀, 2세대 제조 플랫폼으로 피보팅
처음엔 산업용 3D 프린터를 보유한 이들을 플랫폼에 참여시켜 시장을 키우는 방식을 고려했습니다. 그런데 논의를 진행하면서 ‘굳이 서비스를 3D 프린팅에 국한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앞서 3D 허브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제조 분야에도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사업모델이 온라인 주문 제조 플랫폼인 크리에이터블(CREATABLE)입니다.
크리에이터블은 3D 프린팅뿐만 아니라 CNC(컴퓨터수치제어) 공작기계, 사출 성형 등 전통적인 제조 분야에 대한 서비스를 추가했습니다. 고객이 온라인에서 특정한 가공방식을 정해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면 크리에이터블이 그에 적합한 제조업체(파트너)를 선정해 주문을 낸 뒤 제조 과정 전반을 관리하는 방식입니다.
조메트리나 사업모델을 확대한 3D허브스처럼 다양한 파트너(제조업체)와 손잡고 고객의 요구에 맞춰 기존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해내는 시스템입니다. 3D 프린팅을 비롯한 일부 주문은 에이팀벤처스가 보유한 장비를 이용해 직접 제조하기도 했습니다.
에이팀의 순항은 계속될 수 있을까…
크리에이터블 서비스를 통해 에이팀벤처스의 매출도 안정세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쉐이프엔진과 비교해 기업 고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고 서비스 분야가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전체적인 수요 또한 크게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밀려드는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직원이 늘어났고, 바쁘게 거래처를 오가는 에이카(에이팀벤처스 회사 차량)의 엔진은 식을 새가 없었습니다.
지난 2010년 미국 싱귤래리티 대학 연수 과정에서 3D 프린팅의 가능성에 눈을 뜬 고산 대표가 3D 프린팅을 통해 국내 제조업을 혁신하고자 지난 2014년 창업한 에이팀벤처스는 한 차례 피보팅(pivoting·사업모델 전환)을 통해 비로소 안정 궤도에 올라서는 듯했습니다.
애초 생각했던 것과 달리 3D 프린팅 기술의 확산이 더뎌 우회로를 택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제조 산업을 혁신하겠다는 본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순조로운 항해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또 다른 갈등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 3세대 제조업 플랫폼, 캐파(CAPA)의 탄생에서 계속>
“우리는 막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조업의 주식시장이 되어가고 있다.
(제조업) 플랫폼에서 산출한 견적가가 시장청산가격(market clearing price)이 될 것이다.”
Bram De Zwart(CEO of Hubs), Forbes 인터뷰 중에서